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기리영 전투 (문단 편집) == 영향 == 백제국은 이때를 기점으로 폭발적인 성장을 이룩하여, 반 세기도 지나지 않아 기존 마한보다 더욱 응집력 있는 고대 국가로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 과정에서 한군현에게 복속한 옛 마한 소국들은 대부분 백제국의 직접 지배 영역으로 편입되었다. 목지국 또한 옛 제후에게 하극상을 당하면서 마한의 맹주 자격을 부정당하게 된다. 일종의 [[어부지리]]인 셈이다. 한편 한군현이 진한과 직접 교역하게 되면서 [[진한]]의 성장에도 이바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여하튼 이 전투로 진한왕이 마한왕을 중간에 끼지 않고 한군현과 소통하는 관행이 정착되었으며, 이는 적어도 기원후290년까지 이어지게 된다. 진서를 보면 이후 3세기 중후반 경 한반도 정치체들과의 교섭에서 진한왕이 직접 서진 측에 조공하는 기사가 자주 등장하는 걸 보면 알 수 있다. 백제국 거수가 [[마한왕]]이 되었다지만 그 이전 마한왕이었던 [[목지국]] 거수와는 달리, 진한왕보다 우위에 서지는 못했던 관행이 정착된 것.[* 이 시기에는 침미다례의 맹주 신운신국 혹은 신미국 또한 백제의 마한 맹주 자격을 부정하면서 독자적으로 마한왕 행세를 한데다, 충북 일대 마한 목지국 지지 세력이 거세게 백제에게 저항하고 있었으니 애초에 백제의 마한왕 위치도 견고하지 못한 형편이었다. 진한 맹주인 사로국 거수가 이 시기 백제를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문헌 근거가 없어 알 수 없으나 사로국 또한 백제를 마한왕으로 인정하지 않았을 개연성은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다. 원래의 마한 수장국이었던 건마국 잔여 세력과, 백제의 협박 탓이었겠지만 천안 용원리 목지국 분가 세력이 백제를 지지한 것과는 별도로, 백제의 마한 맹주 자격은 적어도 372년 근초고왕의 침미다례 정벌 전까진 마한 내부에서도 완전한 합의를 이루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